중드 원작소설/양진미금

양진미금 良陳美錦 제8장 관리 管事

율구월 2026. 10. 9. 23:40

금조는 옷을 갈아입고 창가의 널찍한 온돌 평상에 앉았다. 등 뒤에는 커다란 등받이 베개를 받쳤고, 몸 아래에는 금실을 섞어 구름과 학 무늬를 수놓은 푹신한 방석을 깔았다.

 

잠시 뒤 가벼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금조가 고개를 들자 바닥에 엎드려 예를 올리는 시녀가 보였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렸을 뿐, 장신구 하나 꽂지 않은 모습이었다.

청포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맑았다.

 

“소인 청포, 아가씨께 문안 올립니다.”

 

어린 시절 기씨 가문에서 지낼 때면 청포는 언제나 금조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청포는 무예를 익힌 적이 있어 보통 여자들보다 키가 크고 힘도 셌다. 금조가 나무 위의 새 둥지를 갖고 싶어 하거나 예쁜 회화나무 꽃송이를 따 달라고 조르면, 청포는 순식간에 나무를 타고 올라가 가져다주곤 했다.

 

말수가 적고 아주 영리한 편도 아니었지만, 충직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금조에게 한결같이 잘해 주었다.

 

청포는 올해 열여덟 살이 되었을 것이다. 이미 혼인하기에 적당한 나이도 훌쩍 지나 있었다.

금조는 평상에서 내려와 몸을 굽혀 청포를 일으켜 세웠다.

 

청포는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훨씬 야위었고, 예전의 고운 얼굴도 많이 상해 있었다. 피부에는 누런빛이 돌았다.

금조가 청포의 손을 잡았다. 청포는 깜짝 놀랐다.

 

주인과 하인은 신분의 높낮이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어찌 자신의 손을 잡으신단 말인가!

 

청포가 황급히 손을 거두려 했지만 금조는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가로세로 가득 메운 상처들을 살펴보며 물었다.

 

“이 손은 어쩌다 이렇게 됐어?”

 

청포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은 주방에서 장작을 패다가 생긴 상처입니다. 별것 아닙니다.”

 

금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라고 장작을 패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장작을 팼을 뿐인데 손이 어찌 이 지경이 된단 말인가!

금조는 청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고란이 너를 괴롭혔어?”

 

청포가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소인이 무예를 익혔다고 하여, 둘째 아가씨께서 도끼를 쓰지 말고 맨손으로 장작을 패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소인은 해낼 수 있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귀하신 몸이시니, 이렇게 거친 소인의 손을 잡으셨다가 다치실까 걱정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금조는 기씨 가문에서 지내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청포는 금조를 데리고 나무에 올라 새를 잡은 적이 있었다. 나중에 다른 시녀가 그 모습을 보고 일러바치는 바람에, 외조모는 청포에게 문밖에서 무릎을 꿇고 벌을 서라고 명했다. 그 벌은 꼬박 이틀이나 이어졌다.

 

어린 금조는 자신이 먹던 송병과 녹두떡, 실처럼 가늘게 뽑은 엿 따위를 품속에 몰래 감추어 청포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러면 청포는 금조의 손바닥에 놓인 과자를 허겁지겁 먹었다. 작은 과자 부스러기 하나까지도 남기지 않고 핥아 먹곤 했다.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자 금조는 가슴 한구석이 갑자기 아려 왔다.

목소리도 조금 약해졌다.

 

“……내가 너를 내쫓았던 일이 원망스럽지 않아?”

 

청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해 아가씨께서 소인의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소인의 목숨은 아가씨의 것입니다. 아가씨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든 소인은 따를 것입니다. 어찌 아가씨를 원망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금조의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청포는 여전히 예전의 청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는 더 이상 옛날처럼 가깝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어찌 원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을 수 있겠는가.

금조는 그저 청포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덜 원망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앞으로 천천히 잘못을 갚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잠시 생각하던 금조가 말했다.

 

“앞으로는 다시 내 곁에서 시중들도록 해. 월례금은 이등 시녀에 준해 지급하되, 다른 대우는 모두 일등 시녀와 같게 해 줄게.”

 

그녀는 청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괜찮겠니?”

 

청포는 다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이 다시 아가씨를 모실 수 있다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청포의 아버지는 본래 기씨 가문의 정원사였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술을 몹시 좋아했다. 걸핏하면 술에 취해 돌아와 아무런 구실이나 붙여 청포를 때리고 욕했다. 한번은 청포가 거의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바로 그때 어린 금조가 청포를 구해 주었다. 그저 말 한마디를 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청포는 줄곧 금조의 곁을 지키며 한결같은 충성을 바쳤다.

 

청포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소인이 취훤원에서 일 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일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청포는 금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디 둘째 아가씨를 조심하고 경계하십시오.”

 

청포의 얼굴은 무척 진지했다. 금조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알고 있어. 너는 이제 막 돌아왔으니 우선 내려가 쉬도록 해.”

 

어찌 되었든 청포가 자신에게 품은 충성심만큼은 진심이었다.

 

청포가 물러간 뒤에도 금조는 평상에 앉아 한참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는 자신의 곁에 있는 시녀들에 관해서였다. 바깥의 적을 상대하려면 먼저 집안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자신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녀들조차 충성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걸어갈 길이 얼마나 험난하겠는가.

 

금조는 우선 곁의 시녀들을 하나씩 정리할 생각이었다. 유향만큼은 절대로 계속 곁에 둘 수 없었다.

 

조금 전의 일을 어찌 알아차리지 못했겠는가. 유향이 가져온 물은 피부에 물집이 잡힐 만큼 뜨거웠다. 그런 물이 금조의 세수에 쓰일 물이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유향은 아가씨의 눈앞에서조차 행동을 삼가지 않았다.

채부는 괴롭힘을 당하고도 감히 변명 한마디 하지 못했다.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아이를 일등 시녀로 삼았던 것일까?

유향의 내력은 더욱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를 시켜 조사해 보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유향을 제외하면 채부는 제법 괜찮았다. 조금 더 가르치고 단련하면 충분히 쓸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반면 백운은 그다지 영리하지 못했다. 나머지 어린 시녀 둘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다.

 

금조가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백운이 들어와 아뢰었다.

 

“아가씨, 동 마마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금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틀림없이 물품 장부에 관한 일일 것이다.

마침 자신도 어떤 물건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던 참이었다.

 

잠시 뒤 동 마마가 들어왔다. 오늘은 머리에 금빛을 살짝 입힌 비녀를 하나 더 꽂고 있었다. 얼굴에도 기쁜 기색이 가득했고 손에는 푸른색 바탕에 구름무늬가 그려진 장부 한 권을 들고 있었다.

 

“……하루 동안 정리하여 아가씨의 물품을 모두 확인했습니다.”

 

금조는 장부를 받아 펼쳤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갈수록 속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가진 물건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골동품과 서화, 가구와 생활용품, 꽃병과 각종 그릇, 금은보화까지. 하나하나 헤아리다 보면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오복헌수 무늬의 금비녀 열두 자루 한 벌.

보석을 박고 은실로 장식한 머리 장신구 네 벌.

비취 팔찌 일곱 쌍.

노란 포도석 두 상자.

금은으로 만든 보석 꽃 장식 다섯 상자.

청화백자 열 점.

홍자기 네 점.

경태람 일곱 점.

백자 여덟 점…….

 

이런 식으로 물건 하나하나를 계산해 보니, 금조의 재산은 무려 은자 일만 냥에 이르렀다. 고씨 가문이 한 해 동안 벌어들이는 수익에 맞먹는 액수였다.

 

그중 대부분은 기씨 가문에서 가져온 물건이거나 외조모가 매달 보내 주신 것이었다.

기씨 가문은 재산도 많고 사업도 크게 벌이는 집안이었다. 이런 물건이야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동 마마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곧 연말입니다. 해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둘째 아가씨의 계례도 있지 않습니까. 아가씨께서도 남에게 선물하거나 하인들에게 상으로 내려 줄 물건을 미리 준비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동 마마는 장부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소인이 생각해 두기로는 구름무늬를 새긴 은자 조각과 붉은 금으로 꽃을 조각한 비녀 몇 벌, 단연(端硯)과 징니연(澄泥硯) 같은 벼루가 좋을 듯합니다……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한 달만 지나면 연말이었다. 그때가 되면 친척과 지인들을 방문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하인들에게 상을 내리는 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금조는 이미 계례를 치렀지만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틀림없이 금조가 공훈 귀족 가문들을 자주 방문하기를 바라실 터였다.

 

다른 곳은 몰라도 기씨 가문과 영양백(永陽伯) 가문, 같은 사리호동(四里胡同)에 사는 송씨 가문에는 가야 했다.

나현호동(羅賢胡同)의 정국공 번씨 가문과 고씨 본가에도 방문해야 했다.

 

그런데 동 마마의 말을 듣자 금조는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연말이 다가오고 있으니…….친동생 고금영(顧錦榮)도 곧 돌아오겠구나.

 

아버지는 고금영을 집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니 모두가 귀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라다가는 지나치게 응석받이가 될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금영이 여덟 살이 되자 칠방호동(七方胡同)으로 보내 공부하게 했다. 그곳에는 덕망 높은 한림원 원로 학사 두 명이 학당을 열고 있었다. 대대로 공훈을 세운 귀족 가문과 고관 집안의 자제들이 많이 모여 공부하는 곳이었다. 심지어 진위후(鎮威侯)의 세자와 정국공 가문의 적자 둘도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금조는 고금영을 떠올리며 동 마마에게 물었다.

 

“이제 연말이 다가오는데, 큰도련님은 언제 돌아오지?”

 

동 마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흘에서 닷새 안에 돌아오신다고 들었습니다. 마님께서도 국류각 옆의 정방재(靜芳齋)를 미리 정리해 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큰도련님께서 돌아오시면 그곳에서 지내실 것입니다.”

 

그녀는 덧붙였다.

 

“그래서 소인이 벼루 두 개를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가씨께서 큰도련님께 선물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금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가 마음을 많이 썼네.”

 

하지만 속으로는 벼루가 그리 좋은 선물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고금영은 칠방호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훌륭한 벼루도 이미 많이 보았을 것이다.

금조가 가진 단연 몇 개도 재질은 뛰어났지만, 이름난 장인이 만든 진귀한 명품까지는 아니었다.

 

사실 금조는 고금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아홉 살이 되기 전까지는 기씨 가문에서 살았다. 남매가 만나는 때라고 해 봐야 연말이나 추석 같은 명절뿐이었다. 만나더라도 몇 마디 나눌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금조가 고씨 가문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고금영이 칠방호동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그 뒤로는 일 년 내내 집에 없다가 연말에나 돌아오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고금영에 대한 기억은 몹시 흐릿했다. 이 동생이 대체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야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고를 수 있을 텐데.

 

금조가 동 마마에게 분부했다.

 

“어머니 곁에 계신 서 마마를 찾아가 물어봐. 서 마마는 큰도련님을 어릴 때부터 돌봤으니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조금 더 자세히 일렀다.

 

“큰도련님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평소 어떤 습관이 있는지까지 모두 알아봐 줘.”

 

동 마마는 공손히 대답했다.

 

금조는 다시 유향의 내력을 떠올렸다.

그녀는 동 마마를 조금 가까이 불렀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마마가 믿을 만한 시녀 하나를 골라 유향의 내력을 알아보게 해. 절대로 소문이 새어 나가서는 안 돼.”

 

동 마마는 깜짝 놀랐다.

 

“……아가씨의 말씀은 설마…….”

 

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소인이 주제넘게 여쭈었습니다. 아가씨께서 분부하신 일은 반드시 처리하겠습니다. 소문이 조금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구나.

금조는 동 마마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 마마는 어디까지나 안채에서 일하는 하인이었다. 바깥채의 일이나 적안의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알아보려면 아무래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문득 유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유향에게는 유씨 가문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오라버니가 있다고 했었다. 그 오라버니에 대해 알아낼 수만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구나.